삶을 살아가며 느끼는 고뇌와 갈등, 욕심, 혼란 등 모든 번민을 생각하면 한없는 인생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이러한 삶의 무게를 줄일 수는 없을까?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살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신의 종교적인 생각과는 별개로 다양한 종교의 힘을 통해 삶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을 찾아보고자 이런저런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내 삶의 무게를 온전히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 무게를 스스로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깨달음'이라는 문을 지나가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온전히 자신의 감정을 살펴보고, 내가 그러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 감정을
내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들이 어쩌면 모두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일 수 있다고 생각을 하며 이 책의 제목처럼 모든 것이
스스로에게 달렸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스스로 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길을 떠나본다.
이 책의 저자는 존경받는 승려의 아들로 태어나, 티벳 불교 전통 안에서 폭넓은 훈련을 받았다.
명망 높은 명상 스승들 아래서 수련해 온 그는 불교 수행의 공통분모이자 요체를 ‘자기반조
수행법’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가르침은 서구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가르침을 현대적 감각과 명쾌하고 친절한
해설로 풀어놓는 탁월한 능력으로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마음에 담은 글귀를 정리해본다.
– 금욕이란 말이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라는 뜻이라면, 뭐라도 포기하라는 말은 진짜
터무니없는 억지일 뿐이다. 하지만 포기라는 것이 오직 ‘고통의 원인’ 자체를 버린다는 뜻이라면,
누구라도 엄청난 열의를 느끼며 한시바삐 그렇게 하려 할 것이다.
– 깨달음에 대해 갖고 있는 견해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혼란을 조화시키려는 몸부림으로부터
구도의 여정이 시작된다. 그 몸부림은 자유와 행복을 향한 깊은 갈망의 표현이며, 그 자체로 우리들
누구나 갖고 있는 마음의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리켜 보이는 표지라고 할 수 있다.
– 깨달음은 자신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는 자각이다. 깨달음을 통해 현상의
진정한 본성을 보는 동시에 다양하게 펼쳐진 현상의 모습을 아는 지혜가 드러난다.
– 자기반조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런 판단 없이 솔직하게 지켜보는 마음가짐이자
실제행위다.
– 어떤 식으로 표현되었든 간에 모든 불법의 요체는 자기 중요성을 줄여 진리가 숨 쉬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자기를 되비쳐 봄으로써 그런 공간을 만드는 일이 시작된다.
– 자아감각을 강화하기 위해 삶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조작하는 짓을 그치면,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무치게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수행자가 삶을 대하는 방식이다.
– 불교도의 관점에서 뭔가를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 본래
그대로의 모습이 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 자기반조 수행의 요점은 조작하거나 변화시키려는 노력으로 흙탕을 일으키는 일 없이 세상만사를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 귀찮은 생각이나 감정에 대처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오직 한 가지, 그런 생각이나 감정이 자연스레
펼쳐지도록 놓아두는 것뿐이다. 억제하려고 하지도 말고 빠져들지도 말라.
– 모든 생각은 지각이나 신념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신념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의 일치된 견해를
받아들여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현상을 ‘읽어낸 결론’이 꼭 정확한 것일까?
– 무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절대 또는 현상의 본질에 대한 무지가 그 하나이고, 상대 세계를 정확히
읽어내는 것을 가로막는 무지가 다른 하나다.
– 이번 생에서 어떤 행운이라도 경험한다면, 그것은 과거에 했던 훌륭한 행위의 열매다. 훌륭한
행위란 우리의 자연스런 선성의 표현, 진리 쪽으로 우리를 이끄는 행위를 말한다. 행운은 그저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행운은 우리의 과거 행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베푼 친절에서 비롯된다.
– 우리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를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습관이나 두려움과 함께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춤을 춘다는 것은 상황을 만든 근본 에너지를 알아차리고 그 에너지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 아침에 잠이 깨면, 일어나 앉아 몸에서 자신을 느껴보라. 그다음에는 머리와 머리카락에 신경을
쓰고, 차례로 아래로 내려가며 자기 몸에 주의를 기울여보라.
– 감정은 그저 감정일 뿐 있는 그대로의 그대 자신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 반응은 학습된 사회적 관행으로부터 온다. 사회로부터 우리는 소중히 여길 것이 무엇인지,
상황에 따라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하는지와 같은 것을 배운다.
– 불법佛法의 관점에서 볼 때 금생에서 우리의 가장 큰 소원은 불안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세속의 속박을 벗어던지고 무집착, 에고 없음, 일체 존재의 참된 본성으로 뛰어들게
되길 원한다.
– 마하싯다는 완성된 존재 혹은 깨달음을 얻은 존재로, 특히 제자들이 무지와 망상을 벗어나서
깨어나게 만들기 위해서 관행을 벗어난 방법이나 형식을 쓴 사람들을 지칭한다.
– 수행자란 경험하게 되는 ‘혁명’이 부정적인 마음을 명료하고 긍정적인 사고 패턴으로 변화시킨다.
– 위대하고 깊은 보리심의 수행이야말로 수행자가 맞이하는 궁극의 도전이다. 깨어난 마음의
가르침인 보리심에 의해 우리는 생명 있는 일체의 존재가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와 ‘행복’이라는
똑같은 소원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 보리심이란 문자적으로는 ‘깨달은 마음’이다. 상대적인 수준에서 보리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염원으로서의 보리심이 있고, 육바라밀의 수행을
포함하는 실천으로서의 보리심이 있다. 절대적인 보리심은 모든 현상의 본성에 대한 통찰이다.
– 고통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은 “괴로움을 참고 견딘다”는 뜻이 아니다. 괴로움의 진정한
본성을 보았기에, 기쁘게 괴로움을 맞이할 용기를 갖는 것이다.
– 계획을 너무 심각하게 여기면, 자신의 마음과 몸을 고문하고, 소중하기 짝이 없는 날 모두를
스트레스와 고통, 혼란 속에서 낭비하게 될 뿐이다.
– 삶을 단순화하라는 말은 찬장에 든 것을 다 비워내서 구세군에게 갖다 주라는 뜻이 아니다. 목적에
대해 분명한 의지를 가지라는 것이고, 살아가고 마음 쓰는 방식을 목적에 맞게 하라는 것이다.
– 삶의 목적은 자기self, 에고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의 참 성품인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이다.
– 우리는 내면의 갈등이나 집착을 놓아버리기 위해 수행한다. 내외의 대상을 향한 집착, ‘자아’에
대한 집착을 모두 놓아버리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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